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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대프랑스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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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를 계기로 결성되어, 나폴레옹 몰락과 유럽 재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쟁이다.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프랑스의 불패 신화가 무너지자 영국, 러시아, 스웨덴 등 여러 국가가 동맹을 맺고 대(對) 프랑스 전쟁에 참여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참전, 주요 전투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로 프랑스는 독일에서 철수해야 했고, 결국 파리가 함락되어 나폴레옹은 퇴위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전쟁으로 약 250만 명의 병력이 참전하여 200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후 빈 회의를 통해 유럽의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다.

2. 배경: 나폴레옹의 몰락과 유럽의 재편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그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로 인해 유럽의 세력 균형이 급격하게 변화했으며, 억압받던 국가들이 독립과 자유를 쟁취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이끈 65만 명 규모의 러시아 원정군은 프랑스군의 대패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최소 37만 명의 사상자와 20만 명의 포로를 냈다.

2. 1.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그 영향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가 대륙 봉쇄령을 유지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러시아를 침공했다. 최대 65만 명(절반 정도가 프랑스인이고 나머지는 동맹국 또는 지배 지역 출신)으로 구성된 그랑 다르메|프랑스어는 1812년 6월 24일 네만 강을 건넜다. 러시아는 조국 전쟁을 선포했고, 나폴레옹은 "제2차 폴란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침공 부대에 거의 10만 명의 병력을 제공한 폴란드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리고 러시아와의 추가 협상을 염두에 두고, 그는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재건하는 것을 피했다. 러시아군은 퇴각하면서 침략군에게 유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했고, 마침내 보로디노 전투(9월 7일)에서 두 군대가 치명적인 전투를 벌였다. 프랑스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결정적이지 못했다. 전투 후 러시아군은 철수했고,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 열렸다. 9월 14일까지 프랑스군은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그 도시는 사실상 텅 비어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서유럽 기준으로는 전쟁에서 거의 졌음에도 불구하고) 항복을 거부했고, 프랑스군은 버려진 모스크바에서 음식과 피난처가 거의 없는 채로 (모스크바의 상당 부분이 불에 탔다) 겨울이 다가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리로 가는 명확한 길이 없었기에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재앙적인 대후퇴가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퇴각하는 군대는 식량 부족, 탈영, 점점 더 혹독해지는 겨울 날씨로 인해 압박을 받게 되었고, 총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와 다른 민병대가 이끄는 러시아군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랑 다르메의 총 손실은 전투, 기아, 혹독한 날씨로 인해 최소 37만 명의 사상자, 20만 명의 포로였다.[1] 11월까지 2만 7천 명의 건강한 병사만이 베레지나 강을 다시 건넜다. 나폴레옹은 이제 군대를 떠나 파리로 돌아가 진격하는 러시아군에 맞서 바르샤바 공국을 방어할 준비를 했다. 처음 보였던 것처럼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러시아군도 약 40만 명을 잃었고, 그들의 군대도 마찬가지로 고갈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급선이 짧았고 프랑스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군대를 보충할 수 있었다. 특히 나폴레옹의 기병대와 마차 손실은 대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1]

2. 2.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의 결성

1812년 초, 영국은 이미 8년 동안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으며, 3년 이상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포르투갈 및 스페인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1] 러시아스웨덴은 대륙 봉쇄령에 가입하도록 강요받았지만, 영국과 비밀리에 무역을 계속했다.[1] 1812년 1월, 프랑스군은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점령하여 스웨덴의 재산을 몰수하고 장교와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1]

이에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 스웨덴 왕세자는 중립을 선언하고 영국과 러시아에 외교관을 파견하여 새로운 연합을 모색했다.[1] 스웨덴은 1812년 4월 5일, 러시아와 비밀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했다.[1] 7월 18일, 외레브로 조약으로 영국과 스웨덴 및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어, 러시아, 영국, 스웨덴 간 연합의 기초를 형성했다.[1]

1813년 유럽의 전략적 상황


1812년, 프랑스의 그랑 다르메프랑스어가 러시아에서 큰 피해를 입자, 나폴레옹의 무적 이미지가 흔들렸다.[1] 12월 14일, 마지막 프랑스 군대가 러시아 영토를 떠났고, 프로이센 등 동맹국들은 반란을 고려했다.[1] 1812년 12월 30일, 타우로겐 조약으로 프로이센 군단이 중립화되었고, 1813년 2월 칼리슈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동맹국 편에 섰다.[1]

오스트리아는 1813년 2월에 프랑스와의 동맹을 종료하고 무장 중립으로 전환했다가, 8월에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1] 3월 3일, 영국은 노르웨이에 대한 스웨덴의 주장을 인정했고, 스웨덴은 영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선전 포고,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해방시켰다.[1] 3월 17일,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나의 백성에게라는 소집령을 발표, 3월 13일 프랑스에 선전 포고했다.[1]

반도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약화된 틈을 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1813년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1] 6월, 영국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가담했다.[1]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의 중재 시도가 실패하자, 오스트리아는 1813년 8월 동맹국에 합류하여 프랑스에 선전 포고했다.[1]

결과적으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은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를 계기로 형성되었다.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군 37만 명이 사망하고 20만 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큰 피해를 입자, 각국은 프랑스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2]

1813년 2월, 프로이센 왕국이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동맹에 참여했으며,[2] 8월에는 오스트리아 제국, 스웨덴, 라인 동맹 제국들도 참여하여 영국 중심의 대동맹이 결성되었다.[2]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한 국가는 다음과 같다.[2]

국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영국)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스웨덴
라인 동맹 제국


3. 1813년 독일 전역: 해방 전쟁

1813년, 독일 지역은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해방 전쟁'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서 잃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군대를 빠르게 증강시켰다. 그는 뤼첸 전투(라이프치히 근처, 5월 2일)와 바우첸 전투(1813년 5월 20~21일)에서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프랑스군 역시 상당한 병력을 잃었다. 이 두 전투는 당시 나폴레옹 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기병대의 말 부족으로 인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1]

나폴레옹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피해가 막대했고, 두 연합군은 증원군이 절실히 필요했다. 많은 러시아 장교들은 프랑스군을 러시아에서 몰아내는 목표를 달성했기에 귀환을 원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전쟁 재개를 의심했고, 두 번의 패배는 평화를 재고하게 만들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전투 중단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또 다른 승리는 오히려 연합군에게 유리한 평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1]

프랑스군의 손실도 컸고, 기병대 말 부족은 심각했다.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나 프리드란트 전투와 같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새로운 군대는 신병들로 채워져 있었고, 필수품 부족과 긴 행군, 빠른 기동으로 지쳐 있었다. 나폴레옹은 휴전이 필요했고, 연합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휴전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와의 면담에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비난하며 도발했고, 이는 오스트리아가 연합군에 가담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몰랐지만, 휴전은 연합군에게 더 많은 이득을 주는 심각한 실수가 되었다.[1]

한편, 1813년 5월 21일, 뒈벨른 장군이 지휘하는 스웨덴 군단은 함부르크를 점령했다. 덴마크가 나폴레옹을 위해 도시를 지키겠다고 선언하면서 북부 독일에서 스웨덴의 완전한 협력을 보장받게 되었다. 함부르크 점령은 연합군에게 환영할 만한 소식이었지만, 다부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함부르크를 재탈환하기 위해 접근하자 스웨덴군은 철수했다. 다부는 1814년 나폴레옹 퇴위 이후까지 도시를 점령했다. 이는 플레세비츠 휴전 전 봄의 마지막 주요 행동이었다.[1]

3. 1. 프로이센의 참전과 민족주의 고양

1813년 3월 17일, 프로이센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옛 영토 회복을 위해 참전했다.[1] 이는 독일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나의 백성에게라는 소집령을 발표하여 국민들의 참전을 독려했다.[1]

타우로겐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 군단을 중립화시켰던 요르크 장군은 칼리슈 조약으로 프로이센이 동맹국 편에 서게 되면서 면죄부를 받았다.[1]

최초의 무력 충돌은 1813년 4월 5일 뫼케른 전투에서 발생했으며,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은 프랑스군을 격파했다.[1]

3. 2. 오스트리아의 참전과 복잡한 셈법

7월 29일 프라하에서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양측 모두 양보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회담은 결렬되었다.[1] 8월 10일 휴전 기간이 끝나자, 8월 11일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1] 오스트리아는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참전 결정을 내렸다.

3. 3. 주요 전투와 전황의 변화

1813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으로 손실된 군대를 재건하기 위해 20만 명의 신병을 징집했다. 3월 17일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옛 영토 회복에 나섰고, 4월 28일에는 러시아의 장군 쿠투조프가 사망하고 비트겐슈타인이 총사령관이 되었다.

5월 2일, 라이프치히 근교 뤼첸에서 비트겐슈타인 휘하의 러시아군이 군단을 기습했으나, 나폴레옹의 즉각적인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병력을 잘 철수시켜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5월 20일 - 5월 21일 바우첸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에 다시 승리했지만, 네의 측면 공격 지연으로 연합군을 완전히 격멸하지는 못했고, 프랑스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1]

6월 4일, 오스트리아의 중재로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양측은 병력을 재편했다. 그러나 7월 29일 프라하 강화 회의는 양측의 이견으로 결렬되었고, 8월 11일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휴전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30만 명을 집결시켰지만, 연합군은 45만 명 이상을 집결시켜 각 전선에서 프랑스군을 압박했다.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웨덴 연합군은 나폴레옹 본대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그의 부하 부대들을 각개격파하는 전략을 취했다. 8월 23일 그로스베렌 전투에서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우디노 군단을 격파했고, 9월 6일 데네비츠에서는 네 군단을 격파했다. 8월 26일 카츠바흐 전투에서는 뵐리처의 프로이센군이 맥도날 군단을 격파했다.[1]

남쪽에서는 슈바르첸베르크의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드레스덴을 공격, 나폴레옹이 증원하여 8월 26일 - 8월 27일 드레스덴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군이 승리했지만, 방담은 쿨름 전투 (8월 29일 - 8월 30일)에서 포위되어 7,000명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계속 소모되었고, 바이에른 왕국마저 연합군에 가담했다.[1]

궁지에 몰린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에 주력을 집결시켰고, 1813년 10월 16일 ~ 10월 19일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졌다. 19만 프랑스군에 36만 연합군이 포위 공격을 가했고, 작센 왕국 군의 배신까지 겹치면서 프랑스군은 패배했다. 나폴레옹은 철수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포니아토프스키가 전사했으며, 프랑스군은 전사 4만, 포로 3만 명을 기록하고 패주했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최대 규모의 전투였으며, 독일에서는 "해방 전쟁"으로 불린다.[1]

라이프치히 전투

4. 1814년 프랑스 전역: 나폴레옹의 몰락

1814년 파리에 입성하는 러시아군


1814년, 전쟁은 프랑스 본토에서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독일에서 철수해야 했고, 동쪽에서는 러시아 제국군, 오스트리아 제국군, 프로이센 왕국군, 스웨덴군이 쇄도했으며, 남쪽에서는 스페인을 제압한 영국군이 피레네산맥을 넘었다.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 병'이라 불리던 미숙한 신병들을 이끌고 분전했지만, 6일 전쟁과 같은 국지전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쇼몽 조약을 통한 휴전 제의도 거부한 채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아르시 쉬르 오브 전투 등에서 패배하고 파리마저 함락되었다.

1814년 3월 31일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임시 정부는 나폴레옹의 퇴위를 결의했다. 결국 4월 11일 나폴레옹은 퇴위하고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하면서 몰락했다.[1]

4. 1. 프랑스 본토 전투와 나폴레옹의 저항



프랑스군은 독일에서 철수해야 했다. 동쪽에서는 러시아 제국군, 오스트리아 제국군, 프로이센 왕국군, 스웨덴군이 쇄도했고, 남쪽에서는 스페인을 제압한 영국군이 피레네산맥을 넘었다. 1813년 12월 2일, 연합군은 암스테르담에 입성했다. 12월 21일에는 슈바르첸베르크 군이 라인강을 건넜다. 1814년 1월 19일에는 부르고뉴 지방의 디종이 함락되었다.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 병”이라고 한탄했던 미숙한 젊은 신병들을 이끌고 국지적인 전투에서 종종 승리했다. 예를 들어,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벌어진 6일 전쟁은 나폴레옹의 육군 역사 중 최고 전략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나폴레옹은 샹파뉴에 침공한 10만 명의 블뤼허 군에 대항하여 4만 명의 병력으로 기동 작전을 펼쳐 이를 물리쳤다.

1814년 3월 9일, 영국 주도로 동맹국은 《쇼몽 조약》을 체결하고 1791년 당시 국경의 회복을 조건으로 휴전을 제안했지만, 나폴레옹은 거부했다. 그러나 대국적인 열세를 만회할 길은 없었다. 나폴레옹은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 앞에 아르시 쉬르 오브 전투 등에서 패배했다. 3월 30일 연합군은 수도 파리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파리 방위 책임을 맡고 있던 오귀스트 마르몽은 항복했고, 다음 날인 3월 31일, 연합군은 파리에 입성했다.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임시 정부는 휴전을 위해 나폴레옹의 퇴위를 결의했다. 4월 11일, 나폴레옹은 결국 사직을 했고, 항복 조건으로 《퐁텐블로 조약》이 체결되었다.[1]

4. 2. 파리 함락과 나폴레옹의 퇴위



프랑스군은 독일에서 철수해야 했다. 동쪽에서는 러시아 제국군, 오스트리아 제국군, 프로이센 왕국군, 스웨덴군이 쇄도했고, 남쪽에서는 스페인을 제압한 영국군이 피레네산맥을 넘어왔다. 프랑스군은 꾸준히 밀려났다. 1813년 12월 2일, 연합군이 암스테르담에 입성하였다. 12월 21일에는 슈바르첸베르크 군이 라인강을 건넜다. 1814년 1월 19일에는 부르고뉴 지방의 디종이 함락되었다.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 병”이라고 한탄했던 미숙한 젊은 신병들을 이끌고, 국지적인 전투에서 종종 승리를 거뒀다. 예를 들어,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벌어진 6일 전쟁은 나폴레옹의 육군 역사 중 최고 전략이었다고 평가하는 시각도 많다. 나폴레옹은 샹파뉴에 침공한 10만 블뤼허 군에 대항하여 4만 명의 병력으로 기동 작전을 펼쳐 이를 물리쳤다.

3월 9일, 영국 주도로 동맹국은 쇼몽 조약을 체결하고 1791년 당시 국경의 회복을 조건으로 휴전을 제안했지만, 나폴레옹은 거부했다. 그러나 대국적인 열세를 만회할 길은 없었다. 나폴레옹은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 앞에 아르시 쉬르 오브 전투 등에서 패배했다. 3월 30일 연합군은 수도 파리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파리 방위 책임을 맡고 있던 오귀스트 마르몽은 항복했고, 다음 날인 3월 31일, 연합군은 파리에 입성했다.[1]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임시 정부는 휴전을 위해 나폴레옹의 퇴위를 결의했다.[1] 4월 11일, 나폴레옹은 결국 사직했고, 항복 조건으로 퐁텐블로 조약이 체결되었다.[1]

5. 기타 전선: 이베리아 반도와 스칸디나비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북부군은 다른 연합군과 떨어져 1813년 11월 말 브레멘뤼베크를 해방시켰다. 12월 초, 베르나도트는 연합군의 북쪽 측면을 확보하고 스웨덴에 노르웨이를 할양한다는 덴마크의 조약 보증을 이행하기 위해 덴마크 침공을 시작했다. 프로이센 군대가 블뤼허 군대에 배속된 후, 스웨덴, 북독일, 러시아 군대로만 구성된 약 65,000명의 베르나도트 군대는 홀슈타인에서 덴마크 왕립군을 공격했다.[1]

안데르스 셰울데브란트 장군은 1813년 12월 7일 본회베 전투에서 덴마크군을 격파했고, 3일 후 덴마크 지원군은 세헤스테드 전투에서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반도 전쟁이 계속되었다. 이 전쟁은 나폴레옹에게 수십만 명의 프랑스 군인을 묶어두는 "스페인 궤양"과 같았다.[2]

5. 1.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종결

1813년, 아서 웰즐리 1대 웰링턴 공작은 스페인에서 프랑스 세력을 꺾고 프랑스군을 퇴각시켰다. 웰링턴은 전략적인 움직임으로 보급 기지를 리스본에서 산탄데르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5월 말 북쪽으로 진격하여 부르고스를 점령하고, 프랑스군을 포위하여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사도라 강 계곡으로 몰아넣었다. 6월 21일 비토리아 전투에서 조제프 휘하의 65,000명의 프랑스군은 53,000명의 영국군, 27,000명의 포르투갈군, 19,000명의 스페인군에게 패배했다.[2] 웰링턴은 추격하여 산 세바스티안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고, 산 세바스티안 포위전 이후 산 세바스티안은 약탈당하고 불탔다.

연합군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7월 초 피레네 산맥에 도달했다. 마르샬 술트는 프랑스군 지휘권을 부여받아 반격을 시작하여 마야 전투와 론세스바예스 전투에서 연합군에게 두 번의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영국군포르투갈군 동맹군에 의해 다시 방어적인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기세를 잃었으며, 마침내 소라우렌 전투 (7월 28일과 30일)에서 연합군의 승리 이후 도주했다.

피레네 전투에서 웰링턴은 보급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웠지만, 기동, 충격 및 프랑스군에 대한 끈질긴 추격의 조합으로 승리했다.

10월 7일, 웰링턴은 독일에서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합군은 비다소아 강을 건너 프랑스로 진입했다. 12월 11일, 궁지에 몰린 나폴레옹은 발랑세 조약에 따라 스페인과 별도의 평화 조약을 맺어,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를 석방하고 왕으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신뢰하지 않았고, 전투는 프랑스 내에서 계속되었다.

5. 2. 스웨덴-노르웨이 전쟁과 북유럽의 재편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베르나도트와 그의 북부군은 연합군과 헤어져 덴마크를 침공했다. 이 침공의 목적은 연합군의 북쪽 측면을 확보하고, 스웨덴노르웨이를 할양하는 덴마크의 조약 보증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1813년 12월, 스웨덴군은 홀슈타인에서 덴마크군을 공격했다. 1813년 12월 7일, 안데르스 셰울데브란트 장군은 본회베 전투에서 덴마크군을 격파했다.[1] 3일 후, 덴마크 지원군은 세헤스테드 전투에서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1]

1814년 1월 14일, 스웨덴과 덴마크-노르웨이 사이에 킬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에 따라 노르웨이 왕국은 스웨덴 국왕에게 할양되었다.[1] 그러나 노르웨이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1814년 5월 17일에 자신들의 헌법을 채택했다.[1]

1814년 7월 27일, 베르나도트는 노르웨이를 침공했다. 노르웨이군은 리에 전투와 마트란 전투에서 방어전을 승리하며 선전했지만, 진격하는 스웨덴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2] 그 결과, 1814년 8월 14일 모스 협약이 체결되었다. 베르나도트는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연합 조건은 노르웨이인들에게 관대했다.[3] 노르웨이는 공통의 국왕과 외교를 제외하고 자체 헌법과 제도를 갖춘 별도의 국가로서 스웨덴과의 개인 연합에 동의했다.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은 1814년 11월 4일 노르웨이 의회가 필요한 헌법 개정을 채택하고 스웨덴의 칼 13세를 노르웨이 국왕으로 선출하면서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3]

6. 전쟁의 결과와 영향

나폴레옹의 엘바섬 추방, 1814년 영국 판화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으로 나폴레옹은 패배했고 1814년 5월 4일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망명했던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귀환하여 즉위하면서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이 전쟁에는 250만 명의 병력이 참가했고, 그 중 200만 명이 사망했다. 러시아에서만 100만 명이 사망했으며, 스몰렌스크 전투, 보로디노 전투, 드레스덴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중에서도 특히 규모가 컸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서구에서 이렇게 대규모 전투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6. 1. 빈 회의와 유럽의 새로운 질서

1814년 5월 4일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추방된 후, 프랑스 혁명 이후 망명 중이던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귀환하여 즉위하면서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1]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 지도자들은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기 위해 빈 회의 (1814년 9월 ~ 1815년 6월)를 열었다.[1]

6. 2. 한국에 미친 간접적인 영향

이 전쟁은 직접적으로 한국과 관련이 없지만, 유럽 열강의 세력 재편은 19세기 후반 조선의 개항과 식민지화 과정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전쟁 이후 강화된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6. 3.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확산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자유주의 사상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Spanish Ul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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